나의 주거 역사를 돌아보자면 한국에서는 약 5년 정도의 아파트 생활을 빼면 거의 모든 기간을 주택에서 보냈고, 캐나다로 온 이후 지난 15년 간은 타운하우스와 주택과 콘도 (한국의 아파트 개념)으로 주거생활이 이어진다.
아버지가 지방의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신 관계로 초등학교 졸업 이전에는 내내 사택에서 살던 기억이 있다. 학교와 담을 같이 한 사택의 대문만 지나면 들어서던 학교 운동장이 있었고, 학교 관리인 보다 일찍 출근하시던 아버지 덕분에 난 언제나 제일 먼저 교실에 앉아있었다.
다소 내성적이고 책임감이 강했던 나는 공부가 쉬웠고 잘 했지만, 교장선생님 딸에게 쏟아지던 선생님들의 지나친 관심의 바다에서 필사적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으로 늘 가득했다. 시험지를 받아들고 백지로 내고 말까 하는 반항심도 속으로 삼킬 뿐 그럴 경우 쏟아질 더 많은 관심과 눈총을 견딜 수 없을 거 같아 포기한 적도 있다. 중학교만 들어가면 되겠지 하고 입학하고 보니 그 학교 교장선생님은 무려 다른 도시에서 고등학교를 마치신 엄마의 담임선생님이셨다 흑흑~
이런 이유들로 사택에서 살던 어린 시절의 집에 대한 기억은 그닥 유쾌하지 않다. 다만, 아주 평범한 방 3칸 짜리 한옥에서 오빠 둘이 한방을 썼고 막내 딸인 내게 내 방이 주어졌다는 것은 가장 큰 위안이었다. 남 보기에 어쩌면 특권일 수도 있었던 교장 딸이라는 굴레에 스스로를 옥죄였던 기억이 더 큰 거 보면, 우리 인간은 마음의 방향이 외형을 압도하는 거 같다.
십대였던 나의 집에 대한 기억은 농장과 산이다. 부자였던 이모네가 사놓은 시내에서 30분 거리 농장주택에서 살았던 몇 년 간은 대학과 군대로 떠난 오빠들 없는 고명딸 시절. 또래들과 학원 다니고 떡볶이 먹던 기억은 없고 홀로 배밭을 헤매고 야트막한 뒷산으로 쏘다니며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버스에서 내려 집 까지 걸어 올라가는 길이 제법 멀었는데 엄마가 내내 버스정류장에 나와 기다리시다 내 가방을 받아들고 함께 올라갔던 기억이 선하다.
대학 시절 여의도에 큰 아파트 사시던 이모님 댁에 6개월 머문 기억. 운전기사와 가정부까지 상주하는 큰 집에 지내는 어색함과 불편함을 박차고 학교 기숙사로 들어가 이층침대 윗칸을 배정받은 날 난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6인실의 좁고 불편한 공간이었지만, 마음의 평화는 외형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보내주는 교환학생 자격으로 일년 간 보낸 캐나다의 에드몬톤에 있는 알버타 대학에서의 기숙사 HUB (Housing Union Bldg.)은 아주 특별한 기억이다. 건축상도 받은 아주 멋진 건축물로 유리 천정아래 툭 트여진 공간으로 내려진 배너들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1층은 각종 가게들이 줄지어 있는 몰 형태이고 2층부터 위로는 주거공간 아파트들인데 Studio와 1 베드룸, 2 베드룸, 3 베드룸까지 다양하게 있었다. 내가 살았던 곳은 1인당 렌트비가 가장 저렴한 3 베드룸 2베쓰룸 복층아파트 였는데, 2명의 홍콩 출신 친구들과 함께 3명이 사용하였다. 가운데 주방과 거실 천장이 아주 높아서 전혀 답답하거나 좁은 느낌이 없었다. 돌아보면 이때의 경험이 나중에 캐나다 이민으로 까지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한국으로 돌아와 졸업하고 취업하고 다니며 도곡동의 오래된 작은 아파트에서 광화문으로 출퇴근하며 지냈다. 아파트가 오래된 만큼 단지 안 나무들이 크고 무성하게 자라있었지만 불확실성의 이십대를 보내며 집이라는 곳에 애착이 별로 없었다. 수년 전 이 동네를 지나가며 내가 살던 바로 그 자리 우후죽순 하늘로 뻗은 이상요란한 영어로 표기된 새 건물을 올려다보며 새삼 세월의 흐름을 실감했다.
남편과 사귀다 예기치않게 시댁집을 처음 방문하던 날, 경사 심한 연희동 골목길을 차로 올라가 들어선 큰 대문의 주택에는 몸빼 차림의 두 여인이 계셨다. 알고보니 한분은 시어머니, 한분은 붙박이로 살면서 가정일 도와주시던 아주머니셨는데 주인이신 어머니의 행색이 훨씬 남루했다. 이 두 분은 별 말씀도 없이 넓은 마루 한켠 바닥에 맏이가 (남편) 8살때 부터 써온 건데 다리가 부러지고 없다며 둥그런 큰 상을 펼쳐놓고 밀가루에 콩가루를 더한 반죽으로 칼국수를 밀었다. 그리고는 곧 감자와 호박이 듬뿍 들어간 칼국수 한그릇이 차려지고 마당에서 기른 채소반찬에 계단 틈에서 뜯은 돌나물 무침까지 더해졌다. 냉면대접 한 가득 담긴 뜨끈한 칼국수를 마치 허기진 듯 들이키며, 아 나는 이집으로 시집오는구나 싶었다. 집이 홈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 주택에서 여러 해 살다가 분가하여 5년 정도 살던 아파트 생활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다. 우리집은 2층이었는데 주택에서만 살던 아이들이 엘리베이트 타는 거 신기해하며 일부러 위로 타보던 거와 그거도 시들해지니 자전거 들고 들락거리기에 저층이 오히려 편하다고 했던 것등이 기억날 뿐이다. 아파트 바로 뒤에 있던 학교와 학원에서 또래와 사귈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었던 것은 인정해야겠지만 그 아파트 공간과 나는 끝내 연결되지 않았고 친해지지도 못했다.
어느날, 유학가겠다는 중학생 아들의 말이 있은 며칠 뒤 캐나다 대사관에서 온 전화 한통이 우리의 인생방향을 바꾸어 놓지 않았더라면 아마 우리는 여태 서울 어딘가에서 아파트 전전하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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