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에 입국한 해외입국자는 일주일간 자가격리를 하도록 되어 있다.
그나마 2월 4일 부터 줄어든 것이지만 1월말에 입국한 아들네는 4개월 짜리 갓난쟁이를 데리고 열흘 동안 꼼짝 없이 격리했어야 했다. 요즘은 격리일자만 줄어든 것이 아니라 입국시에 설치해야 하던 앱도 폐지되었다. 이는 매일 전화로 건강체크를 하고 동선 체크를 하던 수단이 없어진 것이니 그야말로 완전 자율적인 자가격리를 하고 있는 셈이다.
2월 29일 밤 늦게 도착한 우리는 PCR검사에 대해 문의하고자 보건소 몇 군데에 문의하니 도무지 연락이 닿질 않는다. 보건소 업무가 과중한가 했으나 알고보니 삼일절이라 대부분 휴무였다. 그래도 선별진료소는 할 거 같아서 숙소에서 걸어갈 수 있는 한곳에 가보니 역시 문을 닫고 있었다. 격리 중에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말아야한다는 생각에 그냥 돌아왔는데 입국시 적어냈던 아들폰으로 문자가 한통 와서 전달 받았다.
아마 입국 다음날이 휴일인 것을 감안한 것인지 격리해제 전 한번 검사하도록 안내되어 있고, 무엇보다 눈에 번쩍 뜨이는 소식은 하루에 2시간 정도는 병원 가거나 그로서리 쇼핑을 위해 외출 된다는 내용이었다. 요즈음의 자가격리는 어찌보면 아무 것도 지키지 않아도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정해진 규칙을 따르지 않는 것이 아주 불편한 성격의 나로서는 이 외출 소식이 너무 반갑웠다.
마음놓고 숙소 앞 과일가게도 만두집도 마트도 출입하게 되었으나 사실 넘쳐나는 인파 때문에 여전히 조심스럽다.
우리가 자가격리용 숙소를 정하기 위해 출국 전 에어비앤비를 많이 찾아보았으나 사진이나 설명과 실제가 다를 수 있다는 생각에 선뜻 정하지를 못하고 있다가 결국은 1월말에 입국한 아들네가 묵었던 바로 그 동묘역 근방 오피스텔로 예약을 했다. 공간은 작지만 건물이 새 건물이고 수납이 잘 되어있고 비품이 청결하고 보건소에 걸어갈 수 있다는 점, 무엇보다 아들네가 머물렀던 곳이라 더 재미있고 의미도 있는 거 같아 선택했다. 와보니 젊은이들 얘기가 틀리지 않았다. 전철역도 딱 1분 거리지만 대로변이 아니라 조용하기까지 한데, 낮에 나가보니 오래된 서울 동네의 낡은 분위기와 근처에 시도때도 없는 서는 만물상 같은 장터로 해서 사람들 왕래가 너무 많아 나가기 꺼려졌다.
숙소 창문을 통해 동묘가 내려다 보인다. 서울에 오래 살면서도 동묘 이름만 들었었지 어떤 곳인지 별 관심도 없고 한번도 와보지 않았던 곳. 어제는 이 동묘공원을 잠시 들어가 보았다. 사실 종일 할일없이 티비를 돌리다 보게된 "벌거벗은 세계사"라는 프로그램에서 삼국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거기에서 동묘 이야기가 나와서 더 흥미가 생겼던 거다.
내가 지하철 역 이름 정도로 알고 있었던 동묘는 동관왕묘를 줄인 말로 삼국시대 중국 장수 관우를 모신 사당이라고 한다. 내가 아는 바 없기에 나무위키에서 다음 내용을 가져왔다. 가져온 내용은 그린색 이탤릭으로 표시했다. https://namu.wiki/w/
東關王廟
서울 동관왕묘(서울 東關王廟) 또는 동묘(東廟)는 중국 촉나라의 장수 관우, 즉 관왕를 모신 관왕묘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묘앞역[1] 근처에 있다.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줄임말을 써 '동묘'[1]라고 부르기도 하고 공자를 모시는 문선왕묘(文宣王廟)를 줄여 부르는 문묘(文廟)에 대응해 무묘(武廟)라고도 불린다.
동묘가 세워진 역사적 배경은,
임진왜란 때 조선 땅에서 싸운 명나라 장수들은 이후 조선에 주둔하면서 조선 땅에 관왕묘를 세우고자 하였다. 조선 조정에도 협력을 요청하고 명나라 조정은 이에 호응하고 적극 지원을 하면서 명나라는 조선에 관왕묘를 지으라고 하였다. 이중 동관왕묘는 경리장수 양호의 후임으로 와 있던 명 장수 만세덕(萬世德)이 권유하여 만든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해인 선조 32년(1599) 공사를 시작하여 선조 34년(1601) 동관왕묘를 완공하였다.[3] 명 신종이 친필 현판과 함께 건축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사를 짓는 중에 신하와 유생들, 그리고 언론삼사는 백성들이 고생한다고 관왕묘를 짓는 것을 반대하였다. (중략)
어쨌든 논란이 많던 건축은 무사히 끝났지만 선조와 신하들은 동관왕묘를 홀대했다. 선조의 왕위를 이은 그 아들 광해군은 동관왕묘의 수리를 명하고 제례를 자내게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후 동관왕묘에 관한 기록은 실록에 나오지 않다가 숙종 때에 가서야 나온다. 숙종은 관우의 충절로 시도 지었고[4] 동관왕묘에 참배도 하였다. 숙종 17년(1691) 2월 17일에는 무안왕묘(동관왕묘)를 보수하라고 하기도 하였다.[5] 이후의 왕인 영조도 동관왕묘에 자주 참배를 했고, 영조 15년(1739) 6월 9일에 동관왕묘를 중수하도록 하였다.[6] 정조도 관왕묘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정조는 동관왕묘에 비석을 세우가 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한제국 때에는 고종이 관왕묘를 적극 지원하고 관왕을 관제(關帝)로 높여 관제묘라고도 하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에는 수많은 관왕묘들이 훼손, 철거되었다. 원래 동대문 밖에 동관묘, 남대문 밖 도동에 남관묘, 명륜동에 북관묘, 서대문 밖 천연동에 서관묘, 종로네거리 보신각 뒤에 중관묘의 다섯 곳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동관묘만 그 위치에 그대로 남아있고 남관묘는 일제가 목멱산(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우면서 헐어버린 것을 지금의 사당동으로 옮겨지어 지금에 이르고, 다른 세 곳은 전하지 않는다.
****************
동관왕묘는 크게 다섯 개 건물로 나뉜다고 한다. 입구의 정문 (외삼문), 외삼문을 지나들어가면 양쪽 큰 나무 아래 3개의 문이 그대로 뚫려있는 중문 (내삼문), 관우의 동상이 있는 건물 (정전), 정전의 동쪽과 서쪽에 있는 두 개의 건물 (동무, 서무)가 있다. 아래 사진들에 대략 표시해 보았다.
고종이 추증한 관우의 시호인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顯靈昭德義烈武安關帝)'가 현판에 적혔다. 동관왕묘는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전쟁 이후에 명나라와 조선에서 우호를 다지면서 굉장히 공을 들여서 지어졌기 때문에 상당히 수준 높은 문화재다.
우리가 갔을 때 동관왕묘, 동묘는 그저 할일없는 우리 같은 사람이 잠시 들러보는 많이 낡고 잊혀진 작은 공원 느낌이었지만 늦겨울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어 삭막함을 가려주고 있었다.
우연치 않게 찾아든 서울의 오래된 동네에서 숨어있던 역사를 발견하며 자가격리의 지루함과 답답함을 잠시 달래보는 시간이었다.
'여행_한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골식당-옥계휴게소-등명낙가사-괘방산-안인항 (0) | 2022.07.20 |
---|---|
대관령 가보기 (국민의 숲 트레킹 코스) (0) | 2022.07.18 |
대관령 치유의 숲 (0) | 2022.07.16 |
백년 만의 초대, 대관령 소나무숲길 (0) | 2022.07.12 |
코비드 상황에 한국 입국하기 (2022년 2월 28일 도착) (1) | 2022.03.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