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 강릉에 정착하여 맨먼저 찾은 곳이 오죽헌이다. 집에서 경포호수를 가려고 7번 국도를 지나다보면 눈에 띄게 기왓집이 모여있는 곳이 내려다 보이는데 알고보니 오죽헌이었다. 어~ 멀지 않네 했는데 따지고보니 집에서 딱 3.4킬로. 차로 5분 거리에 있다. 아이들이 어린 시절, 강릉을 수시로 드나들 때 오죽헌을 두어번 왔던 기억이 있지만 수십년 전 일이다. 마침 밴쿠버에서 지인 부부 오신 김에 함께 다녀오기로 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귀한 손님이신지라~
우리가 오죽헌을 찾은 때는 4월 초순. 바람은 싸늘하나 햇살이 눈부신 봄날이었다.
오죽헌에 들어서니 마침 해설사가 안내를 시작하는 시간이 모양이다. 우리는 옳다구나~ 사임당의 초충도 양산을 예쁘게 받쳐쓴 해설사를 따르기 시작했다.
오죽헌은 연중무휴로 운영되고 성인 기준 입장료는 3천원이다. 강릉시민이 무료임을 이제 보았다. 서울에 주소를 둔 채 강릉에 살고있는 나는 강릉시민일까 아닐까~ㅎ 여하간에 문화재 입장료는 아깝지 않다.
이제 해설사를 따라다니며 얻은 정보와 현장의 안내판에서 읽은 내용을 중심으로 오죽헌을 대략 돌아보기로 한다. 대략이라고 쓴 이유는 역사에 문외한이 나같은 사람이 갈 만한 곳 위주로 그야말로 대략 둘러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나의 짧은 역사 지식으로 알 수 없었던 배경 설명은 주로 강릉시 사이트에서 가져왔다.
율곡 이이 동상
오죽헌 매표소를 통과해서 배롱나무 길을 따라 들어가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율곡이이 동상이다.
본관은 덕수이고 호는 율곡이며 시호는 문성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이고, 어머니는 우리의 구원의 여성상으로 추앙받고 있는 사임당 신씨이다. 율곡은 1536년 음력 12월 26일에 어머니가 용 꿈을 꾼 후에 이곳 오죽헌 몽룡실에서 태어나 1584년 정월 16일에 서울 대사동에서 향년 49세로 별세하였다. 천자가 영오하여 어린 나이인 8세에 화석정 시와 10세에 지은 경포대부는 길이 세상 사람의 찬탄을 받은 글이고 13세에 진사 초시에 장원으로 올라 학문으로 명성을 얻었다. 29세 8월에 명경과에 장원급제하여 양관 대제학과 여러 조의 판서를 두루 거쳤고 사후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율곡은 벼슬길에 있으면서 문, 사, 철의 수많은 저술을 남겨 한국 유학의 거벽으로 칭송 받고 있다. 특히 성리학에서는 독창적 견해로 이기설을 진일보 시켰고 나라와 민생을 걱정한 현실의식에 투철하여 개혁의지를 구현하려고 힘썼으며 그 유명한 10만양병론도 이러한 의지의 표상이다. (동상 앞 설명문)
사실 율곡과 신사임당은 우리 생활 속에 깊숙히 들어와 늘 함께 하는 모자가 아닌가. 손에 쥐고 보면서도 막상 떠올리려면 가물가물해지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다시 들여다본다.
율곡 이이의 초상 왼편에는 대나무 그림이 있는데 이것은 그의 탄생 비화와 관련하여 상징적인 의미로 화폐 안에 담기게 되었습니다. 그의 탄생지인 강릉 오죽헌(烏竹軒)은 까만 줄기의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곳이었다고 합니다. 까만 줄기의 대나무가 생겨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기 때문에 대단한 인물이 이곳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설화가 전해졌고 그곳에서 율곡 이이가 태어났습니다. 대나무 아래에 그려진 건물이 그가 태어난 곳, 바로 오죽헌입니다. 오천 원권 뒷면에는 율곡 이이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그린 두 점의 그림이 들어있습니다. 두 그림 중 왼쪽이 <수박과 여치>, 오른쪽이 <맨드라미와 개구리>입니다. (출처: http://www.edunet.net/nedu/contsvc/)
그리고 신사임당이 모델인 된 오만원권의 앞면에는 사임당의 작품인 묵포도도, 초충도수병 그림이, 또 뒷면에는 어몽룡의 작품인 월매도, 이정의 풍죽도가 그려져 있다.
사실 이 내용들을 알고나면 오죽헌의 반은 알게된 거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율곡 이이 동상 뒤로 신사임당 초충도 화단이 있어 신사임당이 주로 소재로 삼은 오이, 수박, 가지, 양귀비, 맨드라미, 봉선화, 원추리 등을 심어 화단을 조성하였다고 나와있다. 이 식물들 주위로 벌레들이 날라들면 마치 한폭의 초충도를 보는 듯 하다는데~ 패스하고 해설사를 따라 광장으로 나갔다. (다시 가보고 싶다)
자경문
자경문은 율곡 이이가 '스스로 경계하는 글'이라는 의미로 지은 '자경문(自警文)'에서 따온 이름이다.
강릉시 박물관 사이트에 가보니, 율곡이 20세 되던 해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금강산으로 들어 갔으나 1년만에 '불교를 통하여는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 들려 다시 학문에 전념하기 위하여 자신을 각성시킬 11조의 자경문을 지었다고 하며, 자경문 전문이 나와있다. 내용이 지금 읽어봐도 좋아서 전문을 옮겨와봤다.
제1조 입지(立志)
먼저 마땅히 그 뜻을 크게 가져 성인을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 털 끝 만치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한다면 나의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제2조 과언(寡言)
마음이 안정된 자는 말이 적으니 마음을 안정시키는 일은 말을 줄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때가 된 뒤에 말을 한다면 말이 간략하지 않을 수 없다.
제3조 정심(定心)
오랫동안 놓아둔 마음(放心)을 하루아침에 거두어들여 힘을 얻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마음은 살아 있는 물건이다. 마음을 정하는 힘(定心)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마음이 요동(搖動)하여 편안하기 어렵다. 만일 생각이 어지러워질 때에 나의 의지로써 악(惡)을 싫어하여 이것을 끊어버리려고 한다면, 그럴수록 마음이 어지러워지고 흔들리며, 갑자기 일어났다가 홀연히 없어지기도 하는 것이 꼭 내 마음이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가령 이렇게 하여 단절한다고 하더라도 이 단절하고자 하는 생각(斷絶之念)이 가슴속에 가로막혀 있으리니, 이 또한 망령된 생각(妄念)일 뿐이다. 마음이 어지러워지고 혼란할 때는 마땅히 정신을 가다듬어 슬쩍 비추어 보고 따라가지 말 것이니, 이렇게 공부를 오래 하면, 반드시 마음이 엉키어 정해질 때가 있을 것이다. 일을 처리할 때에 한결같이 하는 것이, 이 또한 정심(定心) 공부이다.
제4조 근독(謹獨)
늘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홀로 있을 때도 삼가는 생각을 가슴속에 담고서 유념하여 게을리 함이 없다면 일체의 나쁜 생각이 자연히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모든 악은 모두 ‘홀로 있을 때를 삼가지 않음’에서 비롯된다. 홀로 있을 때를 삼간 후라야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온다’는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제5조 독서(讀書)
새벽에 일어나서는 아침나절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밥을 먹은 뒤에는 낮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에는 내일 해야 할 일을 생각해야 한다. 일이 없으면 그냥 가지만, 일이 있으면 반드시 생각을 하여, 합당하게 처리할 방도를 찾아야 하고, 그런 뒤에 글을 읽는다.
글을 읽는 까닭은 옳고 그름을 분간해서 일을 할 때에 적용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에 일을 살피지 아니하고, 오똑히 앉아서 글만 읽는다면, 그것은 쓸모없는 학문을 하는 것이 된다.
제6조 소제욕심(掃除慾心)
재물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과 영화로움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은 비록 그에 대한 생각을 쓸어 없앨 수 있더라도, 만약 일을 처리할 때에는 조금이라도 편리하게 처리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도 또한 이로움을 탐하는 마음이다. 더욱 살펴야 할 일이다.
제7조 진성(盡誠)
무릇 일이 나에게 이르렀을 때, 만약 해야 할 일이라면 정성을 다해서 그 일을 하고 싫어하거나 게으름 피울 생각을 해서는 안 되며, 만약 해서는 안 될 일이라면 일체 끊어버려서 내 가슴속에서 옳으니 그르니 하는 마음이 서로 다투게 해서는 안 된다.
제8조 정의지심(正義之心)
항상 ‘한 가지의 불의를 행하고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 천하를 얻더라도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行一不義 殺一不辜 得天下不可爲)’는 생각을 가슴속에 담고 있어야 한다.
제9조 감화(感化)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치에 맞지 않는 악행을 가해오면, 나는 스스로 돌이켜 자신을 깊이 반성해야 하며 그를 감화시키려고 해야 한다.
한집안 사람들이 (선행을 하는 쪽으로) 변화하지 아니함은 단지 나의 성의가 미진하기 때문이다.
제10조 수면(睡眠)
밤에 잠을 자거나 몸에 질병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눕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비스듬히 기대서도 안 된다. 한밤중이더라도 졸리지 않으면 누워서는 안 된다. 다만 밤에는 억지로 잠을 막으려 해서는 안 된다. 낮에 졸음이 오면 마땅히 이 마음을 불러 깨워 십분 노력하여 깨어 있도록 해야 한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 누르거든 일어나 두루 걸어 다녀서 마음을 깨어 있게 해야 한다.
제11조 용공지효(用功之效)
공부를 하는 일은 늦추어서도 안 되고 급하게 해서도 안 되며, 죽은 뒤에야 멈추는 것이다. 만약 그 효과를 빨리 얻고자 한다면 이 또한 이익을 탐하는 마음이다.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늦추지도 않고 서두르지도 않으면서 죽을 때까지 해나가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지 않고 탐욕을 부린다면) 부모께서 물려주신 이 몸을 형벌을 받게 하고 치욕을 당하게 하는 일이니, 사람의 아들이 아니다.
오죽헌, 몽룡실
오죽헌은 뒤뜰에 줄기가 손가락만하고 색이 검은 대나무가 자라고 있어 오죽헌이라 이름 붙여졌으며 신사임당과 율곡이 태어난 뜻깊은 곳으로 보물 165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오죽헌’에는 사임당이 율곡을 낳기 전에 용꿈을 꿨다는 데서 이름 지어진 ‘몽룡실’이 있는데, 이곳은 온돌방과 툇마루로 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일자형 집으로 별당 건물로 자리 잡고 있다. 몽룡실에는 신사임당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오죽헌’에는 샛담 서쪽에 있는 평범한 건물인 ‘안채’가 있는데, ‘안채’의 주련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판각해 놓은 것이다.이외에도 정조 임금이 율곡의 유품인 ‘격몽요결’의 원본과 벼루를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인 ‘어제각’이 있다. (강릉시 홈페이지 설명 일부)
2007년 가을 천연기념물 제484호로 지정된 강릉 오죽헌 율곡매는 ‘율곡매’라는 이름으로 매화 애호가들에게 널리 알려진 매화나무다. 600여 년 전인 1400년대 초반에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이 이 집을 짓고, 뒤란에 심은 나무다. 신사임당이 이 집에 머무를 당시에는 이미 100년쯤 된 큰 나무였다. 사임당은 매화를 유난히 좋아했다고 한다. 맏딸의 이름에 매화를 넣어 매창(梅窓)이라 한 것도 매화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보여주는 예다. 뒤란의 매화나무를 극진히 보살폈을 게 틀림없다. 사임당이 남긴 그림 가운데에는 고매도, 묵매도 등 매화를 소재로 한 그림도 여럿 있다. 대개는 자신의 집 뒤란에서 도담도담 자라는 이 매화나무를 보고 그린 것이지 싶다.(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10728019001)
무려 600년이 넘었고 보기에 전혀 생명이 없어보이는 이 율곡매가 올봄에 다시 꽃을 피웠다는 놀라운 뉴스가 있었다.
정갈한 방안에 든 사임당은 침묵 속에서 벼루를 갈아 한 송이 매화 꽃을 그리고, 뒤란의 매화는 까무룩이 암향을 퍼뜨리는 풍경이 긴 세월의 늪을 탈출해 살아난다. 오죽헌의 앞마당에는 오래된 명품 나무가 한 그루 더 있다. 여름에 붉은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다. 이 배롱나무 역시 율곡매와 같은 나이의 나무로 사임당이 이곳에 머물 때 함께 있던 나무다. 뒤란의 율곡매가 꽃 지고 열매를 매달 즈음, 앞마당의 배롱나무는 서서히 붉은 꽃을 피워 여름 한낮의 무더위를 희롱한다.
문성사
문성사는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율곡 이이 선생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문성’은 1624년 8월 인조대왕이 율곡 선생에게 내린 시호로 '도덕과 사물을 널리 들어 통했고 백성의 안위를 살펴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 (道德博聞 安民立政)'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율곡 선생이 쓴 [격몽요결]과 벼루를 보관하기 위해 건축된 어제각이 있었으나 사랑채 북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문성사를 건립하여 율곡 선생의 영정을 모셨다. 율곡 이이 선생 영정은 이당 김은호가 그린 것으로 1975년에 표준영정으로 선정되었다. 선비들의 평상복인 심의를 입고 검은색 복건을 쓰고 있다.
현판 글씨 ‘문성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이 사진과 내용은 강릉시 박물관 사이트에서 가져왔다)
안채, 사랑채
오죽헌 뒷마당을 거쳐 안채로 들어가는 길이다. ㄱ 자형의 안채와 별채, 그리고 입구의 행랑채와 붙어있는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 지어진 오죽헌 내의 건물들은 1505년 병조참판을 지낸 최응현에 의해 전승되어 오다가,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오죽헌과 바깥채를 제외하고 모두 철거되었으며, 현재의 모습은 정부의 문화재 복원 계획에 따라 옛 모습대로 복원된 것이라 한다.
안채에는 신사임당의 시 <사친 思親>이 있다. 신사임당 (1504-1551)이 서울 시댁에 머물며 언제 뵐지 기약 없는 고향에 계신 늙으신 어머니를 간절히 그리워하면서 지은 시다. 한글역을 옮겨오면 다음과 같다.
산첩첩 내고향 천리언마는
자나깨나 꿈속에서도 돌아가고파
한송정가에는 두 개의 둥근 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백로는 모래 위에 모였다 흩어지고
고깃배들 바다 위로 오고 가리니
언제나 강릉 길 다시 밟아가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까?
사임당의 친정어머니를 그리는 시 중 유명한 또 한편은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 즉,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는 제목의 한시가 있다. 이 시는 사임당이 38세 때 친정 어머니의 병문안을 갔다가 시가로 돌아가던 중 대관령 중턱에 앉아서 지은 시라고 한다.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
늙으신 어머님을 강릉에 두고
외로이 서울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 (오죽헌 마을)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어제각
이 건물은 1788년(정조 12년)에 율곡 선생의 유품인 벼루와 격몽요결을 보관하기 위하여 몽룡실 앞에 세워진 것으로 어명에 의하여 건립되었기 때문에 어제각(御製閣)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정조대왕은 율곡 선생이 쓰시던 벼루와 친필원고인 격몽요결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것을 대궐로 올려다 보신 후 감격하시어 벼루의 밑바닥에 율곡 선생을 칭송하는 내용의 글을 친필로 쓰시고, 격몽요결에는 서문을 지어 책머리에 붙이게 하여 오죽헌으로 돌려보내어 강원도 관찰사 김재찬에게 명하여 이 집을 짓게 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76년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한때 철거되었다가 1987년 옛모습대로 이 자리에 옮겨 지은 것이다. 이 곳에 전시된 유품은 모사품이다. (http://www.who-who.net/ii/ojukhun21-1_jpg_view.htm)
그리고 발견한 오죽헌의 이 나무는~~ 흰매화나무다.
동행한 해설사에 따르면 이렇게 매화가 아름답고 절정인 기간은 짧으니 충분히 감상하시라고 한다. 오죽헌에 봄이 왔슴을 온 몸으로 알리는 흰매화나무의 아름다움은 사진으로는 부족하다. 굽어진 가지 아래 꽃터널로 한번 지나가버리기에 아쉬워 자꾸 지나가본다. 꽃 접사촬영을 못한 것이 뒤늦게 아쉬워진다.
율곡기념관
1965년 건립되었던 율곡기념관이 헐리고 지어지기를 반복하다 2012년 10월 21일 재건축하여 재개관하게 되었다.
전시관에는 오죽헌 소장유물에 이창용 전 서울대교수가 기증한 유물을 더한 신사임당, 율곡 이이, 옥산 이우, 이매창, 고산 황기로의 작품과 이우 후손 관련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사임당 작품으로는 채색 [초충도]와 수묵화, [초서]·[전서] 등의 글씨가 전시돼 있으며, 이이의 유품으로는 학문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저술한 『이이 수고본 격몽요결』과 정조대왕이 어람한 뒤 어제어필한 글씨가 새겨져 있는 [벼루], 그리고 그의 저서들이 전시돼 있다.
매창 작품으로는 [참새]를 비롯한 서정성이 짙은 수묵화와 조선중기의 묵매양식을 잘 보여주는 [묵매도], 이우의 작품으로는 빠르면서 대담하고, 다소 거친 듯 하면서도 분방한 필선이 잘 드러나 있는 그림과 글씨가 전시돼 있다.
황기로의 작품으로는 조선시대 초서의 대가답게 활달하고 분방한 필치를 보여주는 [초서-이군옥 시]와 [초서가행 원석]이 전시돼 있으며 그외 옥산 학정공파의 사회적 지위·문화적 교유·예술적 역량을 읽을 수 있는 덕수 이씨 후손의 유품이 전시돼 있다.
위 내용은 강릉시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내용이다. 오죽헌에서 이 박물관에 시간을 좀더 할애하여 찬찬히 읽다보면 뛰어났던 우리 선조들, 특히 시대를 앞서갔던 여성들의 재능에 감탄하게 된다.
기념관을 나오면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표시되어 있다. 오천원권 구권 뒷배경이 된 오죽헌을 가장 잘 찍을 수 있다하여 한번 찍어보았다.
‘어머니길'은 조선조에 사임당이 어린 율곡의 손을 잡고 한양으로 가고, 또 율곡 이이가 대관령을 넘기 직전에 오죽헌에 남겨 둔 어머니를 뒤돌아보던 길이다. 2016년 11월 28일(음력 10월 29일) 사임당 512주년 탄신일을 강릉 오죽헌에서 핸다리 마을의 사모정(思母亭) 공원에 이르는 길(1.5㎞)을 '어머니길'로 명명했다. 세계 유일의 '어머니길'이다. (출처 : 오피니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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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헌을 강릉 오면서 몇 번을 온 거 같다. 어린 아이들 손 잡고 들리고, 손님 모시고 들리고, 우리 끼리 남는 시간 때우려 들리던 오죽헌인데, 최근에 강릉에 지내면서 들리고 이렇게 한 줄 글로 써보면서 다시 보는 오죽헌이다. 날씨가 선선한 어느날 다시 가보고 싶다. 무엇보다 초충도 화단에 가서 사임당이 보았을 식물과 벌레가 어찌 그림으로 구현했는지 천천히 시간을 두고 감상하고 싶다. 한번 따라 그려보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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