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장소가 어디든, 한 줄 글 속에서 다시 가보는 일이 흥미롭고도 유익하다. 그 건물이 그 나무가 그 자리에 있는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고 무심코 지나쳤던 기둥과 주춧돌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고 그 속에 있었던 사람들이 여닫는 문소리, 끌리는 옷자락이 스르륵 느껴지기도 하다. 늘 그렇지는 않지만.
오죽헌을 둘러보고 간 선교장에서의 시간은 길지 못했다. 오죽헌에 왔으니 바로 옆에 있어 들린다는 생각으로 다소 무심하게 지나쳐서 미안하고 아쉬웠던 이 선교장을, 잘 정리된 홈페이지 힘을 빌어 다시 가보고자 한다.
오죽헌보다 훨씬 짜임새 있게 잘 만들어진 느낌이 드는 선교장 홈페이지 (https://knsgj.net/)에 들어가보면 선교장의 역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다.
문화재청의 국가문화유산 포털에서 강릉 선교장에 대한 설명은 같으면서 다르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살림집이다. 전주사람인 이내번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은 집으로, 예전 경포호가 지금보다 넓은 면적으로 조성되어 있을 때 배를 타고 건너다니던 배다리마을(선교리)에 위치하여 ‘선교장(船橋莊)’이라 붙였다. 안채·사랑채·행랑채·별당·정자 등 민가로서는 거의 모자람이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처음부터 계획 하에 전체가 건축된 것이 아니라 생활하면서 점차 증축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안채는 이내번이 1700년대에 처음 지은 건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시대의 여느 상류 주택과 같이 대가족이 함께 생활하던 공간이었므로 (안채의) 부엌 공간을 크게 하였으며 집의 규모에 비하여 소박하고 민가적인 풍취를 나타내고 있다.
안채의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주인전용의 별당건물인 동별당은 'ㄱ'자형 건물로 이근우가 1920년에 지었다. 사랑채인 열화당은 이후(李厚)가 순조 15년(1815)에 지었으며,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안채와 열화당 사이에는 서재 겸 서고로 사용되던 서별당이 있었다. 대문 밖 바깥마당의 남쪽으로 위치한 넓은 인공연못 (안, 옆, 위)에 서 있는 활래정은 열화당을 세운 다음해에 지었다. 돌기둥이 받치고 있는 마루가 연못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누각형식의 'ㄱ'자형 건물이다.
한꺼번에 모든 건물을 짓지 않은 까닭에 통일감과 짜임새는 조금 결여되어 있으나, 낮은 산기슭을 배경으로 독립된 건물들을 적당히 배치하고 각 건물의 구조도 소박하게 처리함으로써, 자유스럽고 너그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또한 소장하고 있는 여러 살림살이들은 옛날 강릉지방 사람들의 생활관습을 알아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선교장은 입장료가 성인 기준 5000원이다. 한옥스테이 이용객과 강릉시민은 입장료 면제란다. 이곳의 한옥 스테이는 어떨지 궁금해진다. 또한, 강릉시에서 파견되는 문화관광 해설사가 점심시간 제외하고 09시~16시 까지 정시 마다 진행된다고 하니 이 시간에 맞추어 가면 아주 좋겠다.
우리가 갔을 때는 해설사도 없고 관람객도 거의 보지 못했고 따가운 봄 햇살 아래 모든 정경이 조용하고 적막했다.
선교장 매표소를 지나 오른쪽에 보이는 연못 앞에 서있다. 아름다운 경관에 이끌리어 자연스럽게 발길이 그쪽으로 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매표소 뒤에 있는 선교장 박물관을 먼저 들렀어야 좋았을 뻔 했다. 그전에 선교장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아주 잘 정리된 투어코스를 보고 따르면 더 좋았겠다.
선교장을 다시 돌아보기 위해서는 선교장 홈페이지의 안내도를 빌리지 않을 수가 없다.
선교장의 연못과 정자다. 정자 이름은 활래정이라 한다.
활래정이라는 이름은 주자의 ‘관서유감’에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내려오는 물(爲有源頭活水來)”이란 구절에서 따왔다. 활래정은 얼핏 보면 ‘ㄱ’자 집인 것 같지만 사실은 각각인 두 채를 맞벽으로 건축한 집이다. 즉 남쪽의 누마루채와 북측의 온돌방채가 이어진 평면인 것이다. 지붕의 구조도 독립적이다. 이런 쌍둥이 집은 아주 드문 경우다.
이렇게 활래정이 쌍둥이로 지어진 것도 역시 청룡의 지세가 약하고 짧은 것을 보완하려는 풍수상의 이유다. 과연 두 개의 팔작지붕이 ‘ㅡ’자와 ‘ㅣ’자로 독립적이어서 연지로 수그러드는 청룡이 다시 바짝 고개를 쳐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내의 기능상으로는 온돌방채에 붙은 넓은 복도로 두 채를 연결하고 있고, 다시 시각적으로 건물 외부로 쪽마루를 두어 계자난간을 둘러서 한 채처럼 보이고 있다.
풍수적인 의미도 찾고, 기능적인 해결도 이루는 동시에 시각적인 통합도 꾀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하는 정자다. (문화유산채널 강릉선교장 활래정 편)
이 내용을 알고보니 사진을 잘못 찍었다. 그래서 두 채를 이어지은 활래정 사진을 가져와봤다.
연못 뒤로 넓은 잔디 마당 뒤로 기와집과 초가집이 몇 채 보인다. (아래 사진)
선교장 홈피에 따르자면 왼쪽 부터 카페 리몽, 시인 묵객등의 거처로 사용된 홍예헌 1,2관, 선교장 집사와 하인들의 거처인 초가 1, 2관 등이다. 맨 오른쪽에 보이는 기와 건물은 생활유물전시관으로 이전에 선교장의 곡식창고였다고 한다.
이제 명품 고택 안으로 들어가볼 차례다. 총 건평이 318평이라는 선교장은 긴 행랑채, 사랑채인 열화당, 중사랑, 곳간채, 안채, 별당, 가묘, 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교장에 들어가자면 먼저 솟을대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대문 옆으로 줄줄이 늘어선 방은 행랑채다. 행랑채는 경포대와 관동팔경을 유랑하는 선비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솟을대문에는 "선교유거", 즉 신선들이 거처하는 그윽한 집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이 솟을대문은 남자들이 통행하고 안채로 가는 여자들을 위한 평대문은 따로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가 쭈욱 늘어선 행랑채를 지나면 열화당이 나온다. 열화당은 선교장의 주인 남자의 거처로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온 이름으로 "가까운 이들의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는다"는 뜻이라 하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의미인가~ 언뜻 느껴지는 어감과는 완전 다르다. 열화당 앞에 설치되어있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차양은 조선말기 러시아 공사관에서 선물로 지어준 것이라 한다.
행랑채, 사랑채를 거쳐 안채와 별당들을 쭈욱 둘러보았으나 흡족한 사진이 없기에 선교장 홈페이지에 있는 안내도와 설명을 다시 여기에 올려 공부해본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다음 방문 때는 좀더 주의깊게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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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가 선교장에서 제일 긴 시간을 보낸 장소는 선교장 둘레길이다.
선교장 뒤로 아름다운 소나무 숲길이 있어 한바퀴해보니 이곳이 왜 명당인지 바로 알만했다.
내려오고 보니 선교장 뒤로 난 소나무 숲길이 전부가 아니라 선교장을 중심으로 전체가 둘레길로 만들어져 있었다. 아름다운 강릉 경포호수 근처 넓은 터에 이런 사대부 집을 지어 유랑하는 선비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시인과 묵객의 예술활동을 지원하고 흉년에는 곳간을 풀어 백성의 가난을 외면하지 않은 우리 선조의 고요하고도 넉넉한 마음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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