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평범하고도 획일적인 중고등 교육을 받는 나로서는 영어가 생활언어로 다가올 기회는 전혀 없었다. 게다가 누구나 다 보던 당시의 영문법 책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고 한 두 챕터에서 늘 그대로였다. 과거완료진행형, 유사관계대명사 이 무슨 개뼉다귀 같은 낱말들이란 말인가. 그냥 집어 던지고 돌아보지 않았다. 난 이해되지 않는 것에는 백지나 마찬가지인 인간형이다.
한편 우리 집은 학교와 너무 먼 농장에 있었기에 학교 마치면 곧장 집으로 가기 바빠서 남들 가는 학원은 중고등 내내 구경도 못해봤고 사실 가고 싶지도 않았다. 혼자 읽고 혼자 노는 게 더 좋았다. 학교 시험은 쉬웠고 성적도 우수했기에 선생님의 지적도 없었고 부모님의 잔소리는 더욱 없었다. 다른 지루한 과목들에 비해 완전 다른 분야 같은 영어가 약간 흥미를 돋구기는 했지만 이 죽어있는 언어를 내가 살려낼 방도는 없었다.
성적으로 입학하던 시기에 인기과라고 해서 무작정 들어간 영문과에서 세잌스피어나 19세기 영미소설 등을 접했지만 여전히 내겐 동굴 속의 벽화 같은 죽은 문장들일 뿐이었다. 대학교를 통과하면서 영어에 대한 나의 무식함에 스스로 탄식하며 연필을 들고 읽은 한가지 문법책은 Grammar In Use라는 책이다. 이 책은 거대한 용어에 짖눌리지 않고 슬슬 읽어 나갈 수 있는 책이라 여럿에게 추천해 주기도 했다.
젊은 시절 나의 취미는 독서와 영화감상. 너무 진부하지만 실제 그랬다. 중고등학교 때 특히 시험을 코앞에 두고 그렇게 잘 읽히던 세계명작에서 벗어나 대학시절 틈만 나면 들리던 종로서적 가판대에는 라면 값 아낀 돈으로 살 수 있는 페이퍼백들이 있었다. 귀퉁이가 조금 낡고 노리짱한 종이에 글씨가 깨알같은 펭귄 클래식 책들과 이름 모를 소설 단행본들이 가판대에 널려있어 내겐 남대문 시장의 골라골라와 같은 너무 재미난 신세계였다.
난 이 소설들을 끼고 살았다. 사실 문학책 보다는 연애소설 추리소설 심리소설이 주를 이루었고 그야말로 페이지 터너 (page turner), 손에서 뗄 수가 없었다. 지금 주인공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국에 모르는 단어나 이해못할 문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린시절 로빈슨 크루소를 한 열댓번 읽으며 내가 무인도로 갔을 경우를 상상하던 때 만큼은 아니었지만 내가 추리한 시나리오대로 작가가 이끌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그중 다중인격을 주제로 한 심리소설들이 제일 흥미로왔다.
사실 난 소설이나 영화에서 결말보다는 줄거리를 엮어가고 결말을 유도해내는 작가의 심리가 더 궁금하다. 그 장면에서 인물의 대사나 배경음악이 무엇인지 그 색깔의 옷을 입힌 이유까지도. 너무 감독 내지는 작가의 입장에서 보는 바람에 스토리라인에 감정이입이 안되는 경우가 많다. 아무튼, 나의 젊은 날의 페이퍼백 단행본들은 데모로 얼룩진 시절 내 청춘의 피난처기도 했다.
동굴 속에 누워있던 영어가, 빛바랜 작은 단행본 속에서 저혼자 살아있던 남의 언어 영어가, 미국회사를 다니며 수없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써야했던 이메일을 통해 나의 일상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민와서 받은 레벨 테스트 시험관은 쓰기가 제일 높은 나에게 자신이 수십년 테스트한 한국 사람들 중 아주 특이한 케이스라고 했다.
나는 여전히 영문법 용어는 놀랄만큼 모른다. 아니 전혀 모른다. 하지만 영어 문장을 읽으면 그냥 이해가 된다. 표현한 문장 뒤에 숨어있는 쓴 자의 의도도 짐작이 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한 번에 쓰는 것도 부담되지 않는다. 문법상 틀린 표현이 여전히 있겠지만 내 뜻을 표현하면 되는 거 아닌가. 언어란 내용과 뜻을 전달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영어권 국가에서 살지만 현지 직장 없이 한인타운에서 사는 생활은 한국에서 보다 더 한국적이라 영어와 점점더 멀어지게 된다. 난 어느 날부터 부엌 아일랜드 위에 아들이 남기고 간 작은 시계 겸용 라디오를 틀기 시작했다. 내 목적은 그저 현지 뉴스와 날씨를 듣기 위함이어서 노래 보다는 뉴스가 많이 나오는 채널을 찾아두고 식사 준비 때는 거의 자동으로 라디오를 틀었다. 30분 간격으로 짧은 뉴스가 나오고 나머지는 대개 다양한 대담프로가 나온다. 가드너가 나와서 원예상담을 하기도 하고 우주비행사가 아이들 꿈을 듣고 상담하기도 한다. 티비는 동작그만을 해야하지만 라디오는 두 손과 두 발이 자유로와 식사준비 시간에 딱이다. 다 보여주지 않는 라디오가 주는 매력이 은근히 컸다. 그러던 어느날 처음 듣는 노래의 가사가 하나하나 내 귀를 지나 내 가슴까지 들어오며 언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경험이 있었다. 뉴스나 인터뷰는 쉽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여전히 헤매고 딴 생각 잠시하는 사이 쑤욱 지나가 버리는 부분이 많다. 뭐 그야 어차피 우리말이 아니지 않은가. 설겆이 하면서도 또렷이 들리고 정신줄 놓아도 팍팍 이해되는 우리네 말 같지는 않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나에게 문제가 있다. 내가 봐도 말을 못한다는 거다. 천성적으로 순발력이 부족한데다 딴 생각을 잘 하는 통에 듣다가도 쑤욱 놓쳐버리고 멀뚱한 적이 많다. 사실 이건 영어만 아니라 우리말에서도 똑같다. 내 속에서 의미를 소화하는 시간이 길기에 반응하는 타이밍을 놓치기 일쑤다. 영어가 손끝에서 귀 속에서 생각 속에서 놀고 있지만 아직 내 입에 도달하지는 못하고 있다. 아마 영영 불가할 듯 하다. 그래도 마음이 편안하다. 어차피 나이가 들어갈수록 입은 닫고 귀는 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니 지갑이었나~)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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