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하면 오죽헌이라 신사임당과 율곡을 떠오르기 마련이지만
경포호에 이르면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를 만나지 않고서는 떠날 수가 없다.
경포호수를 둘러싸는 산책로를 따라 허균의 홍길동전을 형상화한 아담한 캐릭터가 수십 개 세워져있고
초당동 방향으로는 허난설헌 생가터가 있는데 공원과 기념관으로 조성되어 있다.
경포호수 광장을 지나 봄이면 튤립이 만발하는 꽃밭 끝 둥그런 달이 떠있는 옆에
허난설헌 생가터로 가는 다리 난설헌교가 있다.
물론 이 생가터는 초당마을 쪽에 넓은 주차장과 더불어 주 출입구가 있지만
우리는 주로 경포호수를 돌다가 이 다리를 지나 들어가곤 한다.
봄과 여름, 이번 초가을 까지 여러 차례 다녀온 사진들이 섞여있다.
다리를 건너 허균 허난설헌 공원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솔밭이다. 역시 강릉이다.
강릉시 초당동에 위치한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은 조선 시대 만들어진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과 최고의 여류 문인으로 인정받고 있는 허난설헌. 이 두 남매를 기념하기 위한 문학 공원이다.
이 공원은 허난설헌 생가 터,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전통차 체험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허난설헌 생가터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널찍한 사랑 마당이 있고, 그 안에 네모나게 지어진 본채가 있다. 본채는 두 개의 대문으로 안채와 사랑채로 갈리는데, 그 사이에 곳간이 있어 내외를 구분하고 있다.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은 목조 한식 기와로 이루어진 단층 건물이다. 내부는 네모나게 난 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안내 데스크와 만나고 이어 주전시실과 소전시실로 이어진다. (강릉시 홈페이지 참고)
생가터 (초당동 고택)
강원도 강릉에 있는 허난설헌 생가터는 조선 시대 최고의 여류문인 허난설헌의 예술혼과 문학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곳이다. 허난설헌은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이로 8세 때부터 천재적인 시재를 발휘하였으나 27세 때 요절했다. 섬세한 필치로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달래는 노래를 했는데 허난설헌이 죽은 후 동생 허균이 작품 일부를 모아 ''난설헌집''을 간행했다.
2001년 복원된 허난설헌 생가터는 아름다운 솔숲을 지나면 나타나는 전형적인 사대부가 한옥의 형태이다. 솟을대문과 야트막한 담장 안에 대청과 사랑채 안채 등이 있고 우물과 방앗간 옆으로 좁은 문을 두어 여성들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여 남녀의 구분을 두었다. 안에는 허균과 허난설헌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매화나무가 아름답게 자란다. 강원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곳이다.
여러차례 다녀와 계절에 두서가 없지만 대략 같은 장소에 따라 묶어보았다.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
기념관은 자그마한 목조 기와집인데 내부에 난 복도를 따라가며 조선 중기를 살다간 허씨 집안의 역사와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허난설헌은 1563년(명종 18 년) 강릉 초당 생가에서 초당 허엽의 삼남 삼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허난설헌의 이름은 허초희(許楚姬)이다. ‘난설헌(蘭雪軒)’은 초희의 호이며, 난초(蘭)의 청순함과 눈(雪)의 깨끗한 이미지를 따서 ‘난설헌’이라 지은 것이다. 허난설헌은 8세 때인 1570년(선조 3년)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었으며 뒷날 주옥같은 시 213수를 남겼다. 허난설헌은 15세 때인 1577년에 서당 김성립과 결혼하였다. 그리고 1589년 27세의 젊은 나이에 이승을 떠났다.
남동생 허균은 집안에 흩어져 있던 허난설헌의 시를 모으고, 자신이 암기하고 있던 것을 모아서 ‘난설헌집’ 초고를 만들고, 1608년에 ‘난설헌집’을 간행하였다. 여기에는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이 실려 있고,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藩)과 양유년(梁有年)의 서문이 책머리에 실려 있다. ‘난설헌집’은 1692년 동래부(東萊府)에서 중간(重刊)하였다.
허균의 집안은 문장가 집안이었다. 허균은 아버지 허엽(許曄), 큰형 허성(許筬), 작은형 허봉(許篈), 누이 허난설헌(許蘭雪軒)과 함께 오문장가로 불렸다. 또 사림파의 정치력이 형성되던 시기의 동인 집안이었다. 아버지 허엽은 동인의 영수이고, 장인 김효원(金孝元)은 동인의 선봉장이며, 작은형 허봉은 율곡 이이(李珥)를 탄핵하다가 귀양을 갔다.
이처럼 학문적(문학적) 자산과 정치적 자산을 모두 갖춘 허균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득권 안에 안주하지 않았다. 주변의 소외받는 사람들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의 스승이, 그의 친구가, 그의 제자가 서얼이었다. 그는 「호민론」으로 말했다. 백성을 두려워하라고. 「유재론」으로 말했다.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홍길동전』으로 말했다. 이상국가를 건설하자고.
허균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문장과 식견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지만 사람됨에 대해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부정적 평가에 대해 그는 일갈한다. 하늘이 성인을 내렸으니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내려주신 본성을 감히 어길 수는 없다고.
역적모의의 혐의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후 그는 끝내 역적이라는 굴레를 벗지 못했다. 그리하여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의 이름 끝마다 부정적인 평가가 따라붙는다. 그의 삶과 관직생활에서 일부 보이는 태도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비판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시대를 앞서서 내다볼 줄 아는 혜안과 문장가로서의 능력에는 박수를 보내야 할 것이다.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자료 참고)
그리고 8월말 (8월 28일) 어느날 경포호수를 걷던 중 다시 찾은 허균 허난설헌 공원에서는
평소의 조용하고 호젓한 분위기 대신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축제 같은 분위기에 이끌려 들어가 보았다.
8월 28일 난설헌 문화제
각종 전통 놀이를 해보는 체험부스들도 설치되어 있는데 다들 어찌 알고 왔는지
부모와 함께 온 꼬마 손님들이 많았다.
이곳을 다녀온 다음에야 뉴스 검색을 해보니 이 행사에 대한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http://www.gangneung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36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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