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을 결행한 1세대와 부모 따라 어릴 적에 온 1.5세대, 심지어 현지에서 태어난 2세대들 까지 우리 모두의 뿌리가 한국임은 부정할 수가 없는 듯 하다. 이민자들 중에는 생활전선에서 고군분투하다보니 한국 땅을 밟은 지 20년이 넘었다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가까운 록키를 가본 적이 없다는 사람도 있다. 반면에 일년 중 반을 한국에서 보내고 날씨 좋은 봄과 여름은 밴쿠버에서 보내는 은퇴자들도 주변에 있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이민자들은 숙명적인 디아스포라. 그래서인지 공동체 모임들이 많고 그 유대가 매우 끈끈하다. 이런 끈끈함으로 발생되는 문제도 많지만 사람 사는 곳 어디든 인간관계가 그리 쉬우랴~
우리가 이민온지 얼마 안되서 우연히 만난 남편 고등학교 후배의 소개로 한 배드민턴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큰 단지 내에 있는 실내 배드민턴장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서 배드민턴도 치고 싸온 간식을 나누었다. 열명 남짓 대부분 부부들로 구성된 이들은 한국서도 아파트 단지내 배드민턴 회장을 맡았었고 거의 배.신.의 경지에 오른 교수님, 높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 보다 강한 스테미나로 게임을 승리로 이끌던 회장님, 운동이라면 만능인 전 빙상국가대표 선수 였던 부부 까지 모두 실력이 쟁쟁했는데 배드민턴이라고 하면 동네 약수터 똑딱이를 생각하던 내게 이들의 격렬한 게임 모습은 큰 충격이었다. 운동신경이 뛰어난 남편은 교수님의 몇번 지도 아래 금방 A급 선수가 되었고, 운동과 전혀 친하지 못한 나는 여자들 끼리 웃고 떠들고 먹는 쪽에 더 열심이었다. 그래도 가끔 게임에 불러줘서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면 잠시 만에 땀이 비오 듯 쏟아지며 스트레스가 풀리는 맛에 거의 매 주 수 년을 다녔다.
배드민턴 회원들은 배드민턴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과외로 끼리끼리 등산을 자주 다녔다. 우리 부부는 골프 나가느라 바빠서 등산에는 별로 낀 적이 없지만, 어느날 따라 간 곳이 바로 Joffre Lake 조프리 레이크 이다. 회장님의 지시와 인도 아래 배드민턴 회원에서 좀더 확대된 인원 20여명은 서너명씩 카풀을 해서 약속 장소인 스콰미쉬 Squamish 입구의 맥도날드에 아침 일찍 집합했다. 스콰미쉬는 우리들이 사는 동네에서 휘슬러 가는 방향으로 1시간 정도 떨어져 있다. 섬들과 바다 경치로 장관을 이루는 Sea-to-Sky Highway를 중단 없이 달려가서 치프 Chief 바위를 지나자마자 커다란 맥도날드 간판이 금방 눈에 들어오는데 이런 입지로 해서 이곳은 휘슬러 근방 등산하는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고 있다했다. 매주 만나는 얼굴들이지만 이렇게 떠나와서 만나니 더욱 반가운 듯. 다들 커피와 맥도날드 메뉴로 아침을 때우고 조프리 레이크로 출발했다.
사실 등산을 거의 해본 적인 없던 나는 그냥 휘슬러 근방 호수를 보러간다는 말에 시간도 있고 해서 남편과 선뜻 따라나선 거였다. 그런데 에그맥머핀을 먹으며 들은 회장님의 오늘의 등산 일정 이야기는 사뭇 달랐다. 오늘 등산 예정은 휘슬러에서도 60킬로를 더 올라가는 곳에 있었으니 지금 아침 먹은 맥도날드에서는 120킬로도 넘게 떨어진 곳이었다. 게다가 왕복 5시간이 넘는 등산 루트였다. 그러나 어찌하리. 차도 카풀로 왔으니 돌아갈 수도 빠질 수도 없고 따라가는 수 밖에. 휘슬러를 지나고도 한참을 달려 구비구비 산 위로 올라가서 도착한 작은 주차장은 포장도 안된 흙바닥인데다가 뭔가 따끔따끔해서 둘러보니 어마어마한 모기떼들이 새카맣게 사람에게로 몰려드는 것이 아닌가. 아 주차장에서 기다리기도 다 틀렸다. 이제는 산 위로 올라가는 수 밖에 없다~~
조프리 레이크는 팸버턴 Pemberton 동쪽으로 약 35킬로 떨어진 Joffre Lakes Provincial Park에 위치하고 있는데 (주소: Duffey Lake Rd, Mount Currie, BC) 1996년에 class A park으로 등재되었고 최근 들어 그 인기가 급상승해서 많은 등반객들이 찾고 있다고 한다.
조프리 레이크는 공원 주차장에서 시작되는 등산루트를 따라가면서 만나는 3개의 호수를 일컫는다.
주차장에서 약 500미터만 가면 만나는 Lower Joffre Lake를 지나 5킬로미터 정도 되는 트레일을 끼고 Middle Joffre Lake, Upper Joffre Lake가 이어진다. 이 세 호수는 모두 빙하가 침투한 호수들로 호수 바닥에 있는 빙하가루들이 푸른빛과 초록빛 물결을 만들어 아주 신비한 터키석 turquoise 색상을 띄는 호수며 그 색깔은 윗쪽 호수로 갈 수록 더 선명해진다.
1240미터 고도에 위치한 처음 호수를 지나 중간호수 까지 가는 5킬로미터 구간이 아주 가파르다. 자갈길을 가다가 호수 위 다리를 건너고 숲을 지나 1.5 킬로 정도 오르면 큰 돌들로 이루어진 길을 만나게 된다. 이 boulder field를 빙퇴석 (moraine) 이라고 한다. 이 구간은 파노라마 같은 산들과 빙하작용으로 만들어진 U자 모양의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멋진 구간이기는 하나 한여름에 뙤약볕 아래서 가파른 바위들을 건너 오르는 것이 쉽진 않다. 중간 호수는 고도 1535 미터, 가장 위에 있는 호수는 고도 1600 미터라 한다. (내용: 홈페이지 참고 www.joffrelakes.ca)
이 호숫가로 등산을 하며 알아낸 한 가지가 있다.
겨우 따라갈 거 같던 내가 발에 날개가 달린 듯 제일 앞장 서서 걷고 제일 먼저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사실. 오래도록 등산해온 일행들이 놀라며 칭찬해 주었다.
왠지는 나도 모르겠다. 많이 숨이 차거나 힘들다고 느껴지지도 않고 그냥 쉬웠다는 말 밖에는.
그날 컨디션이 특별히 좋았는지, 아니면 나도 모르는 등산 DNA가 내 속에 있을 수도 있다. 이후 등산을 조금씩 하게되고 한국 가서도 여러 산을 남편과 올라보면서 이때 발견한 내 안의 에너지를 새삼 다시 느낀 적이 많다.
그래서 이 곳 조프리 레이크를 오르던 그 발길을 잊을 수가 없다.
더불어 이 등산을 주선해준 회장님께 감사하며 추억한다
P.S.
어느 모임이건 약간 선동적인 부류가 있다. 좀 나서는 거 같아 보여도 그런 사람들 덕분에 모임이 지속되고 일상을 탈출해 보는 재미를 느낄 수도 있다. 이 배드민턴 클럽에서 회장님이 그런 역할을 하셨고 덕분에 우리의 모임은 더 즐겁고 더 넓어지는 경험을 했다. 회장님은 버나비 마운틴을 매일 몇 시간씩 돌고 일주일에 두어차례는 격렬한 배드민턴을 선수 처럼 치고 산악회에서 가깝고 먼 산을 매주 오르는 산악인으로 지내던 어느날 갑자기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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